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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본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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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선 계획과 공사 === [[경인선]]에서 분기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수도권 서남부를 크게 우회하게 되었다. 이는 지금의 [[서울역|서울]] - [[오산역|오산]] 구간이다. 구로 - 안양 구간은 원래의 [[시흥대로(서울)|시흥로]]를 비껴서 [[안양천]]을 따라 지었다. 안양시와 수원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화산 능행길로 놓아져 정조대왕이 능행차 및 [[융건릉]]을 참배하러 가며 왕래하던 통로였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의 수원시 [[정조로]]와 이외 [[경수대로]]와 겹친다. 오산시 구간은 복복선화로 이설되기 전까지 [[병점기지선]]을 지나 죽미령을 피했다. 지금 노선이 만들어진 건 [[2005년]]이다. 경유지 확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1894년 [[추풍령]] 횡단지점 확정 * 1899년 경인선에서 분기하는 노선으로 결정[*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경인선 부설권을 매입한 자본이 주축이었다. 이후 경인철도주식회사는 경부철도에 흡수된다.] * 1901년 전의 - 영동 구간을 전의 - 공주 - 노성 - 진산 - 금산 - 영동으로, 대구 - 삼랑진 구간을 대구 - 현풍 - 창녕 - 영산 - 삼랑진으로 확정 * 1903년 전의 - 영동 구간을 전의 - 조치원 - 회덕 - 영동으로, 대구 - 삼랑진 구간을 대구 - 경산 - 청도 - 밀양 - 삼랑진으로 변경 [[http://web.archive.org/web/20150711025329/http://nekonote.jp/pic/map/plan.html|지도]]를 보면 공주 경유는 한반도 남부를 반 바퀴 도는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호남을 경부선의 직접 영향권에 두는 것과 동시에 당시 한국 정부에서 추진하던 서울 - 목포 간 철도([[호남선]])나 추가 건설되는 철도가 경부지선 형태가 되도록 강요할 목적이 있었다. 일단 경부선을 지어놓고 논산에서 분기하는 호남선까지 일본이 빠르게 선점해 자체 부설 움직임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건설 전 수 차례 탐사 루트는 부침이 심했다.[*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00702_0001081794|「일제, 이미 128년 전 진천·보은 경부선 철도노선 답사」]], 뉴시스, 2020-07-02] 청주, 상주는 [[추풍령]]이 최적 횡단지점으로 결론나면서 완전히 묻혔다. 청주 - 증약 - 추풍령 안도 검토했지만 이러면 현재 [[대청댐]]에 수몰된 지역을 관통해 지나간다. 전의 - 영동 구간이 변경된 것을 두고 공주에서 부설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돌았으나, [[대둔산]] 줄기 한복판을 돌파해야 해서 당대에는 불가능했던 것뿐이다.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 군부의 압력으로, 당시 [[일본군]]은 [[만주]]까지 병력을 실어날라야 했다. 결국 충청도를 우회하는 공주 경유도,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청주 경유도 모두 무산되었고, 최대한 장애물을 피해 가는 전의 - 조치원 - 회덕 - 영동으로 급하게 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대구 - 삼랑진 구간도 소하천이 많아 교량 건설을 많이 해야 하는 노선 대신 [[밀양강]]을 따라가도록 바뀌었다. 이후 경부선 연선에서 벗어나 쇠락한 [[안성시|안성]]과 [[충주시|충주]], [[상주시|상주]] 등 [[영남대로]] 경유 지역[* [[문경새재]](조령)을 이용하는 영남대로는 충주에서 [[남한강]] 상주에서 낙동강을 이용한 수계중심의 교통로라서 철도건설에 부적합하며 중심인 문경새재는 해발고도가 6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이다. [[이화령]] 쪽으로 우회할 수도 있지만 이쪽 역시 해발고도가 500m 넘는 만만치 않은 고지대인데 반해, 추풍령은 해발고도가 약 200미터 정도로 비교적 완만한 지대이다. 당시 경제적 기술적 이유에서도 충주 상주 구간은 선정되기 힘든 구간이다. ]에서는 공주와 비슷하게 지역 유지와 양반들이 반대 했다는 속설이 80년대 이전에 일부 교사들에 의해 국사나 지리시간에 교육 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지역 사학계나 일부에서는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으나 구전 이외에는 근거도 자료도 없는 속설일 뿐이다. 지역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다 해도 일본 주도로 이루어진 선로 결정에 영향을 줄리가 없다. 한국 쪽 요인으로 인해 변경된 것은 당시 공구상 명학동~진위 구간, 그 가운데서도 현재의 [[명학역]]~[[세류역]]에 해당하는 구간 뿐이다. 본래 일제의 계획은 사그내(의왕 고천동)를 지나 [[지지대고개]]에서 지지대비 기준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버린 뒤 대유평(정자동)을 지나 팔달산을 관통해 세류동을 거쳐 대황교 일대에서 현재의 경부선 선로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지지대고개 관통이 [[융건릉]] 지세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가 돌아 대한제국 황실에서 우려를 표했고, 조선측 철도원 역시 지지대비 파괴, 팔달산 관통으로 인한 행궁 화녕전 훼손 등을 이유로 노선 변경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바뀐 노선이 명학-군산포-대대동-대황교 순서인데, 이를 현대의 지명으로 바꾸면 [[명학역]]-[[금정역]] 또는 [[군포역]]-[[왕송호수공원]]-[[세류역]]이 된다. 일제 역시 이 방안이 터널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고려해 수용하면서 현대의 경부선 선형이 이때 결정났다. 이로 인해 [[수원역]]의 위치도 바뀐건 덤. 당초 계획상 선형이라면 수원역이 들어설만한 곳은 팔달문과 인접한 팔달산 자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수원의 중심지였던 화성 성곽 안쪽과 가장 가까우면서 남문인 팔달문과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형이 바뀌었기 때문에 수원역의 위치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으며, 수원역과 팔달문을 직선으로 잇는 신작로(現 [[향교로(수원)|향교로]])와 이 도로의 포화로 1930년대 신설된 새 연결도로(現 [[매산로(수원)|매산로]]-[[정조로]])가 개설되는 계기가 됐다.[[http://www.suwonilb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74|#]] 1905년 5월 1일 서울 영등포에서 부산 초량까지 개통된 경부선 운행 소요시간은 14시간이었다. 융희호 [[증기 기관차]]로 평균속도는 시속 31㎞였고 최고속도는 5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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