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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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금강산선 金剛山線|Geumgangsan Line | |
노선 정보 | |
분류 | 간선 |
기점 | |
종점 | |
역 수 | 28 |
개업일 | 1924년 8월 1일 |
소유자 | |
운영자 | |
노선 제원 | |
노선연장 | 67.6km |
궤간 | 1,435mm |
선로구성 | 단선 |
급전방식 | 직류 1,500V 가공전차선 |
신호방식 | ATS-S2 |
최고속도 | 80km/h |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일본의 철도사업가이자 정치가인 구메 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 1861 ~ 1931)가 일본, 대만 등에서 철도로, 필리핀에서 담배제조 등으로 대성공한 이후 사업을 확장하려 나서다 금강산 관광을 목적으로[1] 답사 1년 후인 1919년에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일본에서도 그 명성이 유명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여행했을 정도로 금강산 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일본의 국민적 가인 와카야마 보쿠스이도 금강산을 여행한 뒤의 소감을 노래로 남겼다.
착공 당시는 협궤인 1,067mm 궤간이었으나 철도계의 중진 후루카와 사카지로(古川阪次郎, 1858 ~ 1941)의 제언에 따라 표준궤로 변경된 이 철도는, 갖은 어려움 끝에 1924년 8월 1일에 철원군~금화군 구간을 먼저 개통,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1931년 7월 1일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길이는 116.6㎞이다. 그러나 구메 다미노스케는 금강산선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5월 24일에 향년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 노선의 특징은 사철, 즉 민자로 지어졌으며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전철노선이다. 그 이유는 강원도 구간의 산악 지대를 넘어야 하는 탓이었고, 때마침 당시 건설된 중대리·향천리·지곡리 등지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의 부대 사업 겸 해당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안전장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2]에는 무식하게 무겁고 구조 한계상 빠르고 섬세한 속도 조절이 어려운 디젤이나 증기로 험준한 노선을 신속하게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해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힘 좋고 응답성이 뛰어나며 가벼운 전기철도가 필요하였다.
또한, 해당 철도를 이용해서 신기술을 시험해보려는 성격도 있었는지 강원도 북부의 험준한 산골짜기에 건설하는 철도에다가 표준궤간에 직류 1,500V로 동작하는 전기기관차, 노선이 통과하는 곳 중 금강산의 관문인 해발 824m의 단발령에는 구배가 50‰에 달하는 스위치백이 동시에 적용되었다. 게다가 스위치백이 2개나 있었다! 스위치백을 한 번 해서 단발령을 넘고 단발령을 내려갈 때에도 다시 한 번 스위치백을 넘은 것이다. 당시 스위치백이 있었던 구간은 오량역-단발령역 간 구간. 일본 웹의 지도[3]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건설 중에 굵직한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철원 ~ 금화 간 노선이 완공단계에 있던 1923년 7월 유례없는 호우로 공사 중이던 철도가 막대한 수해를 입었고,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시바우라에 발주한 전동발전기가 파손되는 등 재해가 겹쳐 개통은 지연되었다. 그 탓에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는 당시 한반도 철도운영을 담당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증기 기관차, 객차, 승무원 등을 차용하여 1924년 8월 1일에 임시영업을 개시하였고, 새로 제작한 전동발전기가 도착하여 11월 26일에 본격적인 전동차 운행을 시작할 정도였다.
우여곡절끝에 1931년 7월에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하루 7왕복 열차가 운행되었는데, 가장 빠른 열차가 철원 - 내금강 간 116.6km를 운행하는데 3시간 53분이 소요되어 전기철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평균 시속 30km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개통한 노선인데다 당시 기술 한계로 인해 느려터진 노선이었지만, 당시에는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안한 교통수단이었다.[7] 주 목적은 금강산 관광 목적으로 지어진 노선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본토의 일본인들도 일부러 경성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탔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봄·가을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경성역(훗날의 서울역)에서 직통 침대차가 운행될 정도였다. 화물수송 역시 창도 인근의 황화철광 광산 덕분에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창도역에서 채굴한 황화철광을 흥남의 닛치츠(日窒)콘체른 공장으로 수송했다.
1925년 186명이 이용한 데 그쳤던 관광객이 1938년에는 무려 24,892명으로 폭증하는 추세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약간 쇠퇴하기 시작한 1942년의 영업실적을 보더라도 여객 90여만 명, 화물 23만여톤의 수송량을 기록하였고 연 125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자 전기 사용 통제를 위해 금강산철도주식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8]로 합병된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철이 부족하게 되었고, 1944년 10월 김화군 창도면에서 내금강 사이의 궤도를 불요불급선으로 여겨 철거해서 공출로 뜯어가는 바람에 사실상 폐선되었다.
그래도 백두대간을 넘기 전의 구간인 철원군-창도군 구간은 광산인 유산철광 때문에 살아남아서 그냥저냥 굴러갔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전체 노선이 북한령이 되어 북한 철도성 관할이 되었고, 1950년 상반기까지 열차운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진 후 일대에서 치러진 고지전(저격능선 전투 등) 과정에서 포격, 폭격, 토치카 재료로 상당부분이 파손되었다.
이후 1953년 종전 후 복구하여 1957년부터 운행을 재개하여 국철 산하로 운행 중이며, 2000년 민영화 되어 강원철도에서 운영한다.
창도-내금강 지역을 잇는 대체운송 버스는 시내버스로 전환되어 김화 버스 300번으로 전환되어 관동여객에서 운행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쓰였던 차량은 원산 철도박물관에서 보존 중이다. #
3. 금강산선 연혁 및 역 목록 [편집]
3.1. 금강산선 연혁 [편집]
- 역사
- 1919년: 구메 다미노스케(久米民之助)에 의해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설립. 동 년에 건설 인가 획득.
- 1924년 8월 1일: 철원~금화 간 28.8km 개통
- 1924년 10월 27일: 전기운전 개시
- 1924년 12월 20일: 금화~금성 간 16.6km 개통
-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간 8.6km 개통
-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 간 8.2km 개통
- 1929년 4월 15일: 창도~현리 간 15.1km 개통
- 1929년 9월 25일: 현리~화계 간 12.0km 개통
-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 간 13.3km 개통
- 1931년 7월 11일: 말휘리~내금강 간 8.6km 개통. 전 구간 개통.
- 1942년 1월 1일: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합병.
- 1944년 10월 1일: 전시공출 명령에 의해 창도~내금강 간 49.0km 선로 철거, 폐지.
- 1950년 - 한국전쟁으로 전 구간 폐지.
- 노선 정보
- 노선 거리: 116.6km
- 운영 기관: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개업~1942), 경성전기주식회사(1942~1945)
- 궤간: 1435mm(표준궤)
- 통행 방식: 좌측통행
- 역 수: 28
- 복선 구간: 철원역 내 인입선 등을 제외하면 없음
- 전철화 구간: 전 구간, 직류 1500V
- 보안 장치: ATS-S2
[1] 지금도 금강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관광지' 중의 하나로 높게 평가하며, 신라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이자 인기가 많은 관광지이다. 서울이나 평양에서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본선이나 평원본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놀러가는 편이다.[2] 일본에서도 ATS가 각 선구에 보급된 건 패전 이후이다.[3] 파나마 운하로 배가 산을 넘기 위해서 올라갈 때에는 도크에 물을 담고, 내려갈 때 도크의 물을 빼는 것과 비슷하다. 배는 물을 넣고 빼서 수직으로 오르내릴 수 있지만, 기차는 그럴 수 없으니 스위치백으로 오르내리는 것이다.[4] 그 예시로 2호선은 을지로순환선의 표정속도가 시속 32.5km이고, 3호선은 시속 35.88km, 4호선은 당고개~오이도 계통이 시속 37.3km, 진접~사당 계통이 시속 38.3km. 5호선은 시속 32.6~32.9km, 7호선은 시속 33.3km, 8호선은 별내선 포함 시 시속 36.2km. 9호선은 평일RH 급행 한정으로 시속 39.6km. 우이신설선도 철제차륜 경전철이라 그런지 시속 33.8km로 달린다. 인천도 비슷해서 인천 1호선이 시속 32.5km, 2호선이 시속 33.3km의 표정속도를 쓴다.[5] 다만 시속 30km대가 아닌 경우도 있다. 수도권 전철 1호선 중 종로선 구간(24.6), 6호선(29.1), 신림선(28.875)은 예외적으로 평균 표정속도가 20km대이며, 7호선의 도봉산옥정선 구간은 단선 문제 극복을 위해 시속 61km의 표정속도가 상정되었다. 9호선은 날짜나 시간, 완급에 따라 표정속도가 다 다른데 일반RH는 시속 26.5km지만 평일NH는 완급 가리지 않고 시속 41.1km, 주말 때는 그보다 더 빠른 시속 43.5km를 자랑한다.[6] 사실 다른 지역에서도 전 구간 코레일 노선인 경우, 노면전차인 경우를 빼면 추가적인 예외를 빼고 다 비슷비슷하다.
경기도의 경우 신분당선은 시속 47.9km, 김포 골드라인(철제차륜 AGT)은 시속 45km, 용인 에버라인(LIM)은 시속 36km, 의정부 경전철(고무차륜 AGT)은 시속 32.5km.
부산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0.7km, 2호선은 시속 32.3km, 3호선은 시속 31.9km, 4호선(K-AGT)은 시속 28.8km, 부산김해경전철(철제차륜 AGT)은 시속 38km.
양산의 경우양산 도시철도(K-AGT)가 시속 60km.
대전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4.3km,2호선(노면전차)은 시속 22.06km.
대구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1.0km, 2호선은 시속 34.3km, 3호선(모노레일)은 시속 28.6km,4호선(철제차륜 AGT)은 시속 35.7km.
광주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4.3km,2호선(K-AGT)은 시속 35.9km.
울산의 경우1호선(노면전차)은 시속 18.61~18.69km.[7]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금강산편에 따르면, 금강산선 개통 이전에는 원산까지 경원선을 타고 간 다음 동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 금강산으로 갔다.[8]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전차를 운행했다. 1961년에 이 경성전기와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한국전력공사가 탄생했다.
경기도의 경우 신분당선은 시속 47.9km, 김포 골드라인(철제차륜 AGT)은 시속 45km, 용인 에버라인(LIM)은 시속 36km, 의정부 경전철(고무차륜 AGT)은 시속 32.5km.
부산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0.7km, 2호선은 시속 32.3km, 3호선은 시속 31.9km, 4호선(K-AGT)은 시속 28.8km, 부산김해경전철(철제차륜 AGT)은 시속 38km.
양산의 경우
대전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4.3km,
대구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1.0km, 2호선은 시속 34.3km, 3호선(모노레일)은 시속 28.6km,
광주의 경우 1호선은 시속 34.3km,
울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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